에베소서 3장 14절 ~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이 사역을 하면서 느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분은 성도들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며,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여 주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 이상을 원하시고, 그 이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그분은 우리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기 위해서 결코 타협이 없으신 분이시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기 위해 고난을 즐겨 사용하시고, 끈기와 인내로 그 고난을 통과하고, 더욱 더 성장해 나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시련이나 고난을 닥치게 하시고, 이런 것들에 무뎌지도록 하시는 것 같다.
하나가 끝났다 싶으면 한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평안을 주신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훈련의 시간, 단련의 시간이 찾아 온다. 그건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 온다. 집주인을 통해, 비자 문제를 통해, 프로젝트 펀드를 막아 버리시는 것을 통해 등등. 그야말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 우리의 속사람을 단련시키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일련의 단련을 통해서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게 하신다. 다른 방법, 다른 수단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이 과정을 헤쳐 나가길 바라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련이, 그런 단련의 시간들이 찾아와도 주님께 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면서,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 안에 거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그분의 목적은 단순하다.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단련의 시간, 훈련의 시간, 인내의 시간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그 시간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속사람의 단련이, 속 사랑을 강건케 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분은 한없이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며,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아픈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버릇이 없는 아이처럼 굴지 않길 바라신다. 그분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목으로 선을 넘어 망나니처럼, 철부지처럼 행동하길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더욱 더 성장하길 바라신다. 그래서 그 아픈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다.
그분은 누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신다. 하지만 그분은 더 먼 미래를 보시고, 더 장기적인 안목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지금 당장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속사람을 성장시키고 강건케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우리가 아무리 간구하고, 또 간구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다. 아무리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려도, 애통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도 그분은 꿈쩍도 않으신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분이 원망스럽고, 그분의 뜻이, 그분의 사랑이 의심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분의 방법이, 그분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며 같이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분명 그분은 우리의 애통하는 마음에 같이 애통하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성장을 바라시기에, 우리의 성숙을 원하시기에, 아픈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더 큰 사랑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그분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으신 분이다. 그런데 넘치게 주실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우리 자신이 정하시는 것이지만, 그분은 그 이상을 보고 계시고, 계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셔도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우리의 속사람에 문제가 없을 때에는 마음껏 부어 주시는 것 같다. 그런데 그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이 영향을 받고, 우리의 성품이 변하고, 우리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실 때는 결코 넘치도록 부어 주시지 않으신다.아니, 아주 딱 그만큼만을 부어 주신다. 어떤 때는 너무 감질나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주셔도 좋을 것 같은데, 하물며 1원도 더 넘치지지 않고, 1원이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로 딱 부어 주신다. 정말 치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분은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오랜 동안 지켜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깊이 알고 계시고, 우리가 어디로 튈지, 어떻게 행동할 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 같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부어 주실 수 있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만 그렇게 하신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때로 침묵하시는 것 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의 비난을 감내하실 때도 있다. 왜 이렇게 무고한 생명을 데려가시느냐고,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일으키게 하시느냐고 말이다. 그분의 책임이 아닌데, 바로 우리들의 욕심이 가져온 결과이고, 주님께서 그토록 말리셨고, 원하지 않으셨던 것을 끝끝내 행함으로써, 주님께 등을 돌린 결과로 인한 결과이건만 우리는 그 모든 책임을 주님께 돌린다. 그럼에도 그분은 때로 침묵을 택하신다.
어느 때가 될 진 잘 모르겠지만, 이 목숨이 다하고, 주님께 나아갔을 때 정말 여쭙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내 삶을 복기해 보면서 그 때 왜 주시지 않으셨는지, 그 때 왜 침묵하셨는지, 그리고 그 때 왜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하셨는지 다 여쭙고 싶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들이 왜 우리 주변에서 이토록 많이 일어났는지도 살펴보고 싶다. 궁금한 것도 많고,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것도 많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 두고자 한다.
언제쯤이면 성경 속 믿음의 인물들이 느끼고 경험한 그 모습 그대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될까?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그 깊디 깊은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그분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까? 아무런 불만과 불평 없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떠한 상황이,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찾아와도 묵묵히 받아 들이고, 그 순간을 즐기면서 성장과 성숙을 위한 훈련으로 기꺼이 감내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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